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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X.
2025-04-28 19:03:33
1985년 가을, 뉴욕 맨해튼의 플라자 호텔에서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 간에는 무역 적자와 환율 문제로 보이지 않는 갈등의 불씨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플라자 합의는 바로 그 갈등을 해소하고자 마련된 역사적 만남이었습니다. 강력한 달러로 인해 미국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일본 등은 무역흑자로 번영을 누리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압박을 받는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85년 9월, 세계 5대 경제 강국이 플라자 호텔에 모여 전례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 결정은 이후 국제 경제 질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특히 일본 경제에는 버블(거품) 시대의 서막을 열어주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 미국 달러화의 가치는 가파르게 상승했습니다. 미국 연준(Fed)이 1970년대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금리 정책을 펼친 영향으로, 전 세계 자금이 금리가 높은 미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달러 가치가 치솟자 미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졌고, 그 결과 미국의 무역 적자는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반대로 일본과 서독(현 독일) 등은 거품 경제의 전조를 보일 정도로 수출호황을 누렸고, 막대한 대미 무역흑자를 쌓았습니다. 이른바 “쌍둥이 적자”(막대한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레이건 행정부로서는 상황이 심각했습니다. 미국 산업계도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자동차·전자 등 제조업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빼앗는 일본 제품에 분노하여 일본산 자동차를 공개적으로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일 정도였습니다. 미국 의회에서는 무역보복 조치가 거론되기 시작했고, 자칫하면 보호무역의 악순환으로 번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 환율 조정을 통한 무역 불균형 해소가 해법으로 대두되었습니다. 미국은 직접 금리를 인하하여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안도 고민했지만, 급작스런 통화정책 전환은 금융시장 불안을 초래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강달러 기조는 월가 금융자본에는 이익이 되었기에, 미국 정부로서도 섣불리 방향을 틀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다자 간의 공조 개입을 통해 질서 있게 달러 가치를 낮추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미국의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주요 교역상대국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G5라 불리던 5개국(미국,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이 한자리에 모이기에 이르렀습니다.
1985년 9월 22일,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 미국,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 등 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모였습니다. 회의 직후 이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강달러를 억제하기 위한 협조 개입 계획을 전격 발표합니다. 미국으로서는 "절상된 달러를 질서 있게 떨어뜨린다"는 목표를 실현하게 된 순간이었고, 다른 국가들 역시 무역균형을 바로잡는 데 동참하기로 한 것입니다. 발표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환율을 보다 안정적인 수준으로 조정하기 위해 각국이 협력하여 시장에 개입한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한마디로, 달러 가치를 떨어뜨리고 엔화와 마르크화 등 기타 통화 가치를 끌어올리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합의에는 각국이 각자의 경제 정책도 조정하겠다는 약속이 담겼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은 막대한 재정적자를 줄이도록 노력하고, 일본과 서독은 내수를 진작시켜 대미 무역흑자를 완화하기로 했습니다. 5개국 정부는 외환시장에 직접 개입해 달러를 팔고 엔화와 마르크화를 사들이는 공동 행동에 나섰습니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외환시장의 개입에 대한 실시간 공개가 드물던 시절이지만, 이번만큼은 이례적으로 사전에 합의를 공개 선언함으로써 시장의 방향성을 틀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1985년 9월, 플라자 호텔에서 합의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G5 재무장관들이 나란히 서 있다. 왼쪽부터 서독의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재무장관, 프랑스의 피에르 베레고부아 경제재무장관, 미국의 제임스 A. 베이커 재무장관, 영국의 나이절 로슨 재무장관, 그리고 일본의 다케시타 노보루 대장상이다. 이들은 사상 초유의 환율 공동 개입 발표를 통해 강달러 기조에 제동을 걸었다.
합의 발표 직후부터 효과는 즉각 나타났습니다. 시장은 G5의 공동개입 선언에 화답하여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플라자 합의 후 2년 동안 달러 가치는 주요 통화 대비 약 30% 급락했습니다. 특히 엔화의 달러 대비 환율이 가파르게 변하여, 합의 전 1달러당 240엔 수준이던 것이 몇 년 새 120엔대까지 엔화 가치가 상승(엔고)했습니다. 미 재무부와 각국 중앙은행의 개입도 수반되어, 목표한 환율 조정이 현실화되었습니다. 달러 약세로 미국의 무역수지 적자는 시간이 지나며 상당 부분 개선되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은 플라자 합의 이후 대서방 무역수지 적자가 줄어들었고, 몇 년 뒤인 1990년대 초에는 경상수지가 일시 흑자로 돌아서기도 했습니다. 합의의 1차 목적이던 무역 불균형 완화라는 측면에서는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둔 것입니다.
물론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기대했던 대일(對日) 무역적자 감소는 더디기만 했습니다. 환율이 움직였어도 일본 시장의 구조적 장벽 등 비환율 요인으로 인해, 미국 제품의 대일본수출은 생각만큼 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플라자 합의는 일단 각국 간 통화 협조를 통해 무역마찰을 진정시켰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미국 의회에서 거론되던 강경한 보호무역 법안들도 합의 이후 잠잠해졌고, G5의 협력으로 한바탕 환율전쟁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습니다.
플라자 합의로 가장 큰 후폭풍을 맞은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이었습니다. 엔화 가치가 단기간에 폭등하자 일본의 수출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미국이 원하던 대로 엔고 불황이 현실화될 조짐이 보이자, 일본 정부는 곧바로 경기부양을 위한 대응에 나섰습니다. 일본은행(BOJ)은 금리를 인하하고 시중에 유동성을 풀기 시작했습니다. 수출 둔화를 국내 소비와 자산 시장 붐으로 만회하려 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중 자금이 부동산과 주식으로 몰리면서 일본에서는 사상 초유의 자산 버블(거품)이 형성되었습니다. 1980년대 후반 도쿄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니케이 지수는 불과 몇 년 사이에 몇 배로 폭등했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1985년 전후 1만 정도이던 니케이 평균주가가 1989년에 거의 4만에 육박할 정도로 급등한 뒤, 1990년대를 맞으며 거품 붕괴와 함께 폭락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일본 니케이225 주가 지수의 연말 기준 추이.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저금리와 엔고를 배경으로 주식시장에 거품이 일며 1989년 말 정점에 이르렀다. 이후 버블이 꺼지면서 1990년대 초반까지 지수가 급락했다. 이 자산가격 거품의 붕괴는 일본 경제의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시작을 알렸다.
버블 경제의 후유증은 뼈아팠습니다. 1990년대 초 버블이 꺼지면서 일본의 금융기관들은 부실에 허덕였고, 경제는 장기 침체에 빠졌습니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 불리는 일본의 장기 불황이 시작된 배경에 플라자 합의로 촉발된 엔고와 그에 따른 버블 붕괴가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도 많습니다. 한편, 엔화와 함께 절상 압력을 받았던 서독의 마르크화의 경우 일본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서독은 비교적 안정적으로 통화가치를 관리하고 내수를 진작하며 경제의 연착륙을 이루었고, 버블 형성 없이 통일 독일로 이어지는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플라자 합의의 효과가 나라별로 엇갈린 셈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등 신흥공업국들에게 미친 간접적인 영향입니다. 일본 엔화 가치 상승으로 상대적으로 한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개선되는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마침 1980년대 중반 국제 유가 하락과 저금리 기조, 1988년 서울 올림픽 특수까지 겹치면서 한국은 이 시기 사상 유례없는 수출 호황을 누리게 됩니다. 소위 "3저(低) 호황"이라 불리는 1986~1988년의 경제 호황은 플라자 합의로 인한 환율 여건도 한몫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처럼 하나의 협정이 의도한 효과뿐만 아니라 여러 예상치 못한 파급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플라자 합의는 국제경제사에 남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플라자 합의는 냉전 시대 한가운데서 이루어진 주요 5개국의 경제 공조 노력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달러화의 독주를 막기 위해 경쟁국들이 손을 맞잡았고, 이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미국의 대외 무역수지가 개선되고 환율 변동성이 완화되는 성과가 있었던 반면, 일본에서는 버블경제와 그 붕괴라는 부작용을 겪어야 했습니다. 한 국가의 이익을 조정하기 위한 국제 공조가 다른 국가에는 예기치 못한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국제 경제 협력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합니다. 플라자 합의 2년 후인 1987년, 주요 5개국은 과도한 달러 약세를 되돌리기 위해 다시 루브르 합의(Louvre Accord)를 맺어 환율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이처럼 국제 경제 질서는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한쪽을 움직이면 다른 쪽에 파문이 인다는 교훈을 남긴 것입니다.
4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도 플라자 합의는 종종 회자됩니다. 미국의 대규모 적자와 통화가치 문제,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각국의 협력이란 구도는 시대를 바꿔 가며 반복되고 있습니다. 플라자 합의의 명암을 둘러싼 평가는 엇갈리지만, 분명한 것은 국제 공조의 힘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냈다는 점입니다. 강대국들이 합심하여 시장 흐름을 바꾸려 한 그 실험은, 세계 경제사에 길이 남을 한 장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오늘날 글로벌 환율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제2의 플라자 합의” 가능성이 거론되는 것도 그만큼 이 합의가 남긴 여진이 크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결국 플라자 합의는 당대의 시사 문제였던 무역 불균형을 풀기 위해 선택된 드라마틱한 해법이자, 이후 세대에 여러 교훈을 남긴 사건으로 남아 있습니다.